로타리 청소년교환으로 한국을 찾았던 벨기에 틴에이저가 한국의 '셀레브리티'가 되어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특별한 스토리를 소개합니다
한국의 '저스틴 비버'가 되기까지
줄리안 쿠앵타르(Julian Quintart), 2004-05 로타리 청소년교환 학생, 한국
내가 로타리 청소년교환 학생이 될 것이라는 데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왜냐하면 로타리 청소년교환은 우리집 식구들이 모두 거쳐왔던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1973년에 벨기에에서 미국으로 교환 학생을 다녀오셨고 형도 같은 프로그램으로 미국에 다녀왔다. 누나는 교환학생으로 뉴질랜드 생활을 경험했다. 부모님은 언제나 여행의 중요성을 언급하시며 세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셨다.
내가 담당 로타리안들에게 교환학생으로 한국을 가고 싶다고 하자 이들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시는 2004년, 그러니까 대부분의 유럽인들에게 한국은 싸구려 가전제품을 만드는 나라 정도로 알려져 있을 때였다. 하지만 내게는 한국계 혼혈인 클래스메이트가 있었는데, 나는 그를 통해 한국의 문화와 음악, 그리고 '만화'라 부르는 애니메이션에 심취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조심스럽게 타진을 해 보았던 것인데, 뜻밖에도 이들은 흔쾌히 "예스"라고 대답했다. 나는 마치 산타 클로스에게 자동차를 선물로 받고 싶다고 말했다가 실제로 자동차를 받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냥 말해본 것인데 정말로 이루어진 것이다!
내가 공항에 도착하자 많은 인파가 대형 배너를 들고 나와 있었으며 TV 카메라맨도 대기 중이었다. 나는 이 많은 사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냥 벨기에에서 온 평범한 청년이었으니까. 그런데 카메라맨이 나를 인터뷰하기 위해 다가왔다. 나는 고향에 있는 친구에게 농담삼아 "내가 여기서 TV 스타가 되려나봐"라고 말했는데, 훗날 실제로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 당시 내가 할 줄 아는 유일한 한국말이라고는 "안녕하세요? 나는 사람입니다. 나는 개가 아니예요"(실제 프랑스 한국어 교본에 그렇게 나와 있었다)뿐이었다. 이후 나는 대단히 외향적인 한국인들과 대화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고 6개월 정도가 지나자 한국말을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무렵 내 한국인 친구가 외국인들이 한국의 시골을 여행하는 TV쇼를 제작하고 있었는데, 그가 내게 출연을 요청해왔다. 내가 한국말을 하는 벨기에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그 프로는 내가 귀국한 후에 방송되었는데, 놀랍게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시청자 게시판에 수백개의 댓글이 달리고 검색어 1위를 차지했다. 프로듀서는 내게 전화를 걸어 "다시 한국으로 와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 때 열여덟 살이었고 대학에 진학해야 할 시기였다. 하지만 갑자기 내가 좋아하는 나라로 돌아가 TV에 출연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부모님도 내 의견을 지지해 주셨다. 이 분들은 "물론 다시 가야지. 일생일대의 기회가 아니겠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 나는 수년동안 한국의 TV와 영화에 출연했다. DJ가 되는 법도 배웠다. 다시 TV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도 많이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왜냐하면 외국인으로서 어릿광대처럼 약간 궤도를 벗어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수년 전 '비정상회담'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출연 제의가 들어 왔다. 이 프로그램은 한국인의 생활 양식과 사고 방식을 약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프로그램으로, 전세계에서 온 출연자들과 함께 동성결혼이라든지 성인자녀가 부모님과 함께 사는 문제 등 리얼한 이슈에 대해 토론을 벌인다. 각 출연자들은 이러한 문제가 자신들의 나라에서는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쇼는 가벼운 프로그램이었지만, 한국인들에게 사회적 이슈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기에 공전의 히트를 쳤다. 덕분에 나는 종전과는 차원이 다른 유명세를 치뤄야 했다. 팬들에게 둘러싸이지 않고는 거리를 걸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집까지 찾아와 문을 두드리기도 했고 언제나 팬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한 번은 서울에서 큰 행사가 있었는데 거리 전체가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로 꽉 들어찼다. 나는 마치 좀비 영화에서 좀비들에게 잡아먹히기 않고 무사히 탈출해야 하는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진땀이 흘렀다. 솔직히 말하자면 전세계 아이돌 스타인 저스틴 비버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1년 동안 매주 6개의 쇼에 출연하면서 인터뷰와 다른 활동을 병행해 나갔다.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멋진 경험이었다. 요즘에는 자선활동에 힘을 쏟고 있는데, 얼마 전 지역병원들을 위한 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한국을 자전거로 한 바퀴 돌았다. 이제 내게 어느 정도 유명인으로서의 영향력이 주어진 듯 한데, 나는 이를 좋은 일에 사용하고자 한다.
결국 '초아의 봉사'를 추구하는 로타리로 돌아온 셈이다. 초아의 봉사는 때로 거창하게 큰 일이 될 수도 있지만, 때로는 한 10대 청소년에게 다른 나라를 방문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과 같은 사소한 일도 해당된다.
<이 글은 Steve Almond에게 구술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